오랜만에 편지를 씁니다.

2023년은 여러분들에게 어떤 시간이었나요?

편지를 그만 쓰기로 마음먹기도 했다가, 12월의 마지막 주에 충분히 휴식하며 한해를 돌아보았더니 올한해 감사했던 일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올해부터는 (부디) 조금 더 자주 편지를 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 회사에서 파트너님들과 연말 피드백 시간을 가졌는데 저희 회사 대표님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정말 여러 개의 엔진을 돌리고 있는 것 같아.' 저를 여러 해 동안 봐오셔서 저를 잘 아시는 대표님의 기대와 우려 그리고 애정 섞인 말씀이었습니다. 대표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올해 4개의 엔진을 돌렸던 것 같습니다. 4개의 엔진을 열심히 돌려서 배운 것도 참 많았지만, 제 기둥이 온전히 서지 않은 채 너무 많은 엔진을 무리해서 돌리다 보니 큰 부작용도 뒤따랐었습니다.

올해 투자 심사역으로 승진하고 주도적으로 활발히 투자했습니다. 기후/물 기술 관련 다양한 회사를 만났고, 여러 분야를 공부하며 어느 정도 딥러닝 학습이 되었고, 투자의 감을 익혔습니다. 투자한 회사 기업가들과의 관계, 제가 직접 투자하지는 않았지만 담당하는 회사들의 합병과 경영 위기 이슈 등을 경험하며 임팩트 투자자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고, 투자 여부를 떠나 기업가들과의 만남이 얼마나 의미 있고, 소중한지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올해 초 우연한 만남과 기회들 덕분에, 지방소멸, 저출산, 고령화 문제로 대표되는 한국의 인구문제 해결을 위한 임팩트 펀드 기획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10개월 동안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꽤나 구체화가 되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올해 초에 펀드 결성에 도전해보고자 합니다.

무모하기도 했던 이 도전을 하면서 참 많이 배웠습니다. 이 문제에 진심인 수많은 동료들을 만나며 문제와 솔루션에 대해 깊이를 더할 수 있었고,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고, 임팩트와 수익률을 고민하며 펀드 기획에 책임감을 더하는 과정을 통해 정말 귀중한 배움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묶어낸 모델들을 기획하면서 복잡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임팩트 투자 모델에 대해서 고민해 보는 의미도 무척 컸고, 무엇보다 중간중간 어려움들을 맞닥뜨렸을 때 여러 동료들의 도움으로 일이 되어가는 것을 경험하며, '함께 일하는 것이 이런 거구나'하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올한해 세계경제포럼 산하에 2030 소셜임팩트 리더십 이니셔티브인 Global Shapers Community와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올해 6월까지는 서울 커뮤니티의 리더로 활동했고, 7월부터는 고향인 대전에 커뮤니티를 세워 커뮤니티 빌딩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친구들과 함께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재미를 느꼈고, 저는 제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나름의 리더십을 펼쳤고, 함께해준 친구들이 저의 부족한 부분을 잘 메꿔주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친구들이 보내준 지지와 사랑이 큰 힘이 되었고, 그 친구들과 함께하는 과정에서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올해 6월과 7월에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글로벌 기후위기와 한국의 인구문제를 이야기하며 4개의 엔진을 열심히 돌리는데, 힘에 부치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왜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증폭되었습니다. 제가 만난 어떤 분들은 이런 일을 왜 하는지에 미션, 특히 대상과 대상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는데, 저는 대상과 대상에 대한 사랑은 부재한 채 지난 몇 년간 쌓은 논리만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일을 하는 과정에서도, 함께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보단 때로 미워하고 있는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대상과 대상에 대한 사랑도 없고, 함께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없으면, 거대 담론인 이 일들을 대체 무엇을 위해 하는 것인지 스스로 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거대한 인구문제를 붙들고 해결책을 기획하고 여러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당연히 어려운데, 이걸 '내'가 한다는 생각으로 임하니 굉장히 버거웠습니다.

내 영혼이 살고, 가끔 주변 영혼도 돌봐주고, 일도 영혼 있게 하고 싶은데, 일이 영혼 없이 너무도 커져 제 삶을 잡아먹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를 알아차리고, 내 영혼이 사는 방법은 신앙밖에 없음을 경험적으로 배웠습니다. 이를 인지하고 혼자 발버둥쳐봤지만 단 하루도 내 영혼이 살고, 가끔 주변 영혼도 돌봐주고, 일도 영혼 있게 하는 게 제 힘으론 안 된다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신앙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제자 훈련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첫번째 고장 이후, 제자 훈련을 열심히 받으며 신앙이라는 기둥을 세워가던 11월, 번아웃이 찾아왔습니다. 첫번째 고장 때는 뭐가 문제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차리는 게 쉽지 않았지만, 두번째 고장은 상대적으로 쉬웠습니다. 4개의 엔진을 돌리고, 또 관련된 너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려 하다 보니, 일할 시간, 쉴 시간이 없었고, 쉬지 못한 채 일에 쫓기게 되는 게 반복되며 물리적으로 지쳐갔습니다. 12월 초 심한 몸살을 앓고 난 후에 시간 관리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이제는 외부 미팅, 외부 활동 비율도 컨트롤하며, 시간 관리를 지혜롭게 하고자 합니다.

올해 너무나 감사하게도 소중한 동역자분들을 만났습니다. 기후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국내외 기업가, 전문가, 투자자들, 인구문제를 함께 도전할 여러 동료들, 저와 비슷한 꿈을 꾸며 서로를 응원해줄 수 있는 분들과 깊게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함께 서로 기도해줄 수 있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동역자분들과 함께해서 너무 좋았고, 감사했고, 앞으로의 함께함을 더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동역자들과의 잊지 못할 만남과 대화의 순간들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특히, 일상에서 벗어나 특별한 공간에서 동역자들과의 만남과 대화가 펼쳐지면 그 순간들이 더욱 특별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에겐 올해 여주, 명동, 포항, 영주, 교토, 제나바, 그슈타드, 피렌체, 뉴욕이 특별한 추억의 장소였습니다. 또한, 역삼으로 이사 오면서 동네 친구들과의 시간도 소중했고, 특별히 저희 집 작은 거실을 꾸며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초대해 함께했던 시간들 또한 너무도 소중했습니다.

2023년을 저와 함께해주셨던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함을 전합니다. 2024년에는 삶의 기둥을 잘 세워 맡은 일들을 더 탁월하게 해내고, 주변에 더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